부드럽고, 쫄깃한 그 질감 때문일까. 아니면 갖은 향신료와 양념으로 버무려진 자극적인 맛 때문일까. 사람들은 '고기'를 좋아한다. 무언가 기념하고 싶은 특별한 일이 있거나, 신체가 허약해졌다던가 하는 일들이 있을 때면, 우리는 '고기'를 먹는다. 우리가 먹은 '고기'는 소화되어 다시 우리가 된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우리는 '고깃덩어리'이다. 한때는 자신의 의지로 살아 움직였을 '고기'들이 다른 개체의 몸에 귀속되어 버렸다.
(본 서평에서 '고기'라 함은 채식주의의 반대로 칭하였습니다. 채식주의도 어러 종류가 있고 주인공이 어떤 특정한 채식주의라고 단정지을 수가 없어서 이에 반하는 부류를 '고기를 먹는다.' 라고 하였습니다.)
주인공은 꿈을 꾸게 된다. 그 이후 그녀에게 식사를 준비는 무고한 생명을 빼앗는 과정이 되어버렸으며, 물고기의 원망망어린 외침을 듣게 되었고, 빠알간 선혈이 아직 가시지 않은 생고기를 보면서 더이상 입맛을 다시지 못하게 되었다. 오히려 생명을 가지고 있었을 그 덩어리들에게서 가족들에게서나 느꼈을 미묘한 친근함을 느끼게 된다.
육수에 담긴 찹쌀밥도 먹지 못하고, 김이 모락모락나는 낙지도 입에 댈 수가 없다. 그녀의 의지가 강한 것이 아니라, 몸 자체가 다른 개체를 거부하는 듯하다. 이와 동시에 그녀를 불편하게 하는 것, 바로 속옷(위)이다. 가슴을 옥죄는 듯 숨을 틀어막는 그 끈줄기가 너무나 귀찮다. 그녀의 남편은 고기를 좋아한다. 남편의 동료들도 고기를 좋아한다. 그녀의 주변에는 고기들이 그득하다. 단, 그녀의 젖가슴은 아무것도 해치지 않는다.
야위어버린 그녀는 나무가 되어가는 듯 하다. 그리고 그녀는 꽃을 피우고 싶어한다. 나무는 죽어있는 듯 앙상해 보이는 가지들을 가지고 침묵하고 있지만, 해가 지나고 고기들의 옷이 얇아질 때면 응축했던 생명력을 보란듯이 과시해 버린다.
그녀는 꽃을 피우고 싶어했다. 그래서 가슴을 열고 햇살을 받으려 했다. 야윈 그녀의 몸에 유일한 입체물인 젖꼭지는 더욱 이질적으로 보인다. 그녀에게 억지로 고기를 먹이려 한 가족들은 그녀를 포기했다. 그녀가 고기를 포기하고 자해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허지만, 그녀는 스스로 나무가 되었을 뿐이었다.
형부는 얌전한 사람이었다. 그의 작품들도 그러했다. 그는 꽃을 주제로 한 그림을 주로 찾았고, 그의 별명은 '오월의 신부'였다. 그런데, 그는 원래 얌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깨어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를 깨워버렸다. 누구도 해치지 않는
가슴이 달렸고, 몽고반점이 아직도 남아있는 어느 채식주의자가 깨워버렸다. 형부는 꽃을 그렸고, 채식주의자는 꽃을 피우길 원했다. 형부는 몽고반점을 취하고 싶었고, 꽃의 암술과 수술을 접해야 하기 마련이다.
몸에 꽃을 그린 상태로, 정신병 증세를 보이는 동생을 강간하는 남편을 봐버렸다. 동생은 몸에 꽃이 그려진 채로 햇살을 향해 가슴을 활짝 벌리고 있더라. 남편도 성기를 중심으로 몸에 꽃을 그리고 동생과 교미를 하는 장면을 캠코더로 촬영했더라. 그녀에게 그 캠코더는 무척이나 익숙한 물건이었고, 인상깊은 남편의 작품을 감상해 봤더라.
남편은 도망갔다. 하지만 남편을 반 닮은 아들이 남았다. 그 아들이라는 단어에는 그녀도 반이 들어가 있다는 뜻이 담겨 있다. 결혼 이후 화장품 가게를 똑부러지게 운영하면서 나름의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는데, 동생은 고기가 싫다며 자해했고, 남편은 동생을 강간했고(그녀가 보기에는 그러했다.), 그에게는 아들이 남아버렸다. 가족이 포기한 동생을 정신병원에 입원시켰고, 아들을 이웃집에 맡겼고, 화장품 가게에는 직원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안에서 썩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강하다고 생각했나보다. 장녀였고, 아내였고, 엄마였고, 사장이었고, 언니였다. 남에게 도움을 받기보다는 이끌어주는 사람이었다. 끌어주며 닳아버린 그녀 자신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살을 시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살은 실패했건만, 남은 인생은 타올랐다. 나무가 되고 싶어한 그녀의 동생은, 장작이 되라고 했으면 좋아했을까. 그녀는 타오르고 있는 자신을 직시한다. 그렇지만 불을 끌 수는 없다.
나는 왜 고기를 좋아할까. 고기는 맛있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 맛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라 하면 또 모르겠다. 요즘은 양상추가 그렇게 맛있다. 밥을 먹으면서 같이 먹으면 소화도 잘 된다. 아삭아삭한 식감도 좋다. 별다른 드레싱 없이 잘근잘근 씹고 있다보면 무수한 섬유질이 혀에 닿는다. 그렇지만 채식주의자가 되는건 나에게는 무리라고 생각한다.
"채식주의자"라는 사람들은 어떠한 이유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고기를 포기하게 되었을까. 사상적 이유로, 건강상의 이유로, 고기가 비싸서, 많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나도 달달한 과일과 쫄깃만 면발을 좋아한다.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해서 맛있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논리적으로 나는 채식을 해야 하는 것이 맞다.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는 채식주의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 맞다. 저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 수렵, 채집을 하던 조상들에 대해서 배우지 않았는가. 어느 순간부터 도구를 사용하게 되었고, 다른 생물들을 잡아먹기 시작했고, 지능이 비약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한 것은 맞다. 그런데, 너무 많은 고기를 먹은 나머지 순수한 영양소 섭취원으로의 사냥이 아닌, 고기를 얻는 그 과정에 중독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불필요한 육식에 취해버린 우리에게 이젠 젖가슴마저 공격해올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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